
이사 갈 때마다 짐이 되는 종이 냄새
요즘 이사 준비를 하느라 집안 곳곳을 뒤집어엎고 있는데, 제일 처음에 손이 안 가는 곳이 바로 책장이었다. 2000년대 초반에 용돈을 털어서 샀던 만화책들이 아직도 꽂혀 있다. 4번타자 왕종훈 같은 고전부터 이토 준지의 기괴한 단편집까지, 당시엔 정말 소중했는데 지금 보면 그저 공간만 차지하는 무거운 종이 뭉치들이다. 사실 이사를 몇 번 다니면서 버릴까 말까 고민만 수백 번을 했는데, 그때마다 ‘나중에 다시 읽겠지’ 하는 생각으로 박스에 넣었다 빼기를 반복했다. 그런데 막상 꺼내 보니 종이가 누렇게 변색된 게, 세월이 정말 많이 흘렀다는 게 실감 난다.
인터넷 만화의 파도에 밀려난 종이들
사실 요즘 누가 만화책을 사서 보나 싶기도 하다. 나조차도 침대에 누워서 스마트폰으로 웹툰을 보는 게 일상이 되었으니까. 예전엔 서점에 가서 책을 고르는 맛이 있었는데, 지금은 그냥 검색창에 제목만 치면 바로 볼 수 있는 세상이다. 가끔 무료 만화 사이트나 연애 웹툰 같은 걸 뒤적거리다 보면, 예전에 내가 왜 그렇게 만화책방에 집착했나 싶다. 그 시절엔 만화책 뷰어 같은 개념도 없었으니 손에 잡히는 질감이 중요했을지도 모른다. 지금은 몇 기가바이트의 데이터 안에 수만 권의 만화가 들어가는 시대니까, 종이책의 물리적 존재감이 더 낯설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.
중고 매장에 들고 갔다가 헛걸음만
얼마 전에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알라딘 중고서점에 들고 가볼까 고민했다. 만화책 10권 정도를 챙겨서 나갔는데, 무게가 장난이 아니었다. 한 5kg은 족히 넘었을 거다. 그런데 막상 가져가니 상태가 안 좋다고 매입이 거절되거나, 권당 100원이나 200원 정도를 준다고 하더라. 차비가 더 나오겠다 싶어서 그냥 다시 들고 돌아왔다. 그 땀방울이 아까워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떡볶이 1인분을 사 먹었는데, 만화책 10권을 팔아봐야 떡볶이 값을 못 넘긴다는 게 참 씁쓸했다.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추억일지 몰라도 시장에서는 그저 낡은 재고일 뿐이라는 현실이 묘하게 불편했다.
도서관 기증도 쉬운 일이 아니더라
차라리 근처 공공도서관에 기증이라도 할까 알아봤다. 그런데 오래된 만화책은 기증받지 않는 곳이 더 많았다. 관리가 어렵고 수요가 없다는 이유다. 결국 내 만화책들은 여전히 내 방 한구석에 쌓여 있다. 누군가에게 주기도 애매하고, 그렇다고 분리수거함에 버리자니 표지에 그려진 캐릭터 얼굴이 눈에 밟혀서 테이프를 뜯기가 어렵다. 이토 준지 만화의 괴기한 그림체가 밤에 보면 조금 무섭기도 한데, 왜 나는 아직도 이걸 처분하지 못하고 껴안고 사는지 모르겠다.
다시 상자 속으로 들어간 옛날 책들
결국 이번 이사에서도 만화책 박스는 버리지 못했다. 아마 다음번 이사 때도 똑같은 고민을 하게 될 것 같다. 종이책이 주는 특유의 냄새와 손맛을 잊지 못하는 건지, 아니면 그 시절의 나를 버리기 싫은 건지 알 수가 없다. 인터넷 세상에서 모든 것이 휘발되는 요즘, 유일하게 내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이 무거운 덩어리들이 언젠가는 정말 처분해야 할 골칫덩이가 될 거라는 사실은 분명하다. 그래도 오늘은 일단 박스를 테이핑해서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. 나중에 시간이 더 지나면 마음이 조금 더 가벼워질까, 아니면 더 무거워질까.
집에 쌓인 만화책 생각하면 저도 마음이 쓰이네요. 제가 가진 것도 많아서 처분하는 게 쉽지 않거든요.
답글
웹툰 보는 게 익숙해지긴 했는데, 진짜 종이책의 무게감이 생각보다 더 크게 느껴졌네요. 특히 뷰어 개념이 없던 시절에는 감촉이 중요했을 것 같아요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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