
처음엔 거창하게 생각했다
거실 한구석에 처박아뒀던 노트북을 꺼내 들었다. 영화과 입시를 준비하는 친구들이 다니는 그 흔한 연출학원 근처에도 가본 적 없지만, 왠지 나도 시나리오 한 편쯤은 써낼 수 있을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었다. 사실 시작은 단순했다. 요즘 OTT 플랫폼마다 영화 원작 드라마가 넘쳐나는데, 그걸 보면서 ‘이 정도 이야기라면 나도 만들 수 있겠는데?’ 하는 오만한 생각을 했던 거다. 성균관대 영상학과 합격 수기를 찾아보고 대본 형식을 대충 훑어봤다. 글씨체는 고정폭 서체로 해야 한다느니, 지문과 대사를 어떻게 구분해야 한다느니 하는 기본적인 규칙들 말이다. 그때는 그게 전부인 줄 알았다. 종이 위에 글자만 채우면 그게 곧 영화가 될 거라는 철없는 믿음이 있었다.
대사 한 줄 쓰는 게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
막상 흰 화면에 커서가 깜빡거리니까 머릿속이 하얘졌다. 주인공이 처음 등장해서 내뱉는 첫 대사를 고민하는 데만 한 시간이 걸렸다. ‘안녕’이라고 할지, 아니면 아예 침묵으로 시작할지. 2017년에 개봉했던 영화 ‘싱글라이더’를 다시 봤다. 이주영 감독이 안소희 배우를 염두에 두고 썼다는 그 캐릭터의 섬세한 감정을 따라 해보고 싶었는데, 현실의 나는 겨우 편의점 알바생의 푸념이나 적고 있었다. 카페에서 3,500원짜리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3시간 동안 앉아 있었는데, 건진 건 겨우 A4 용지 반 페이지였다. 밖에는 사람들이 바쁘게 지나다니는데 나만 멈춰있는 것 같은 그 기분이 참 묘하더라. 글쓰기 부업으로 시나리오를 써보겠다는 생각 자체가 얼마나 순진했는지 그때 깨달았다.
묘사와 설정 사이에서 길을 잃다
등장인물의 감정선을 따라가다 보면 갑자기 이야기가 산으로 간다. 영화 시나리오라는 게 단순히 내 머릿속 장면을 옮기는 게 아니더라. 누군가에게 이 장면을 설명하고, 또 누군가는 그걸 읽고 카메라 구도를 상상해야 한다는 사실이 꽤나 부담스럽게 다가왔다. 목포대나 다른 영화 관련 캠프에서 배우는 기초 교육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나 보다. 프레임의 이해나 콘티 제작 같은 전문적인 용어를 몰라도 상관없을 줄 알았는데, 글을 쓰면 쓸수록 내 머릿속의 영상이 활자로 번역되면서 다 증발해버리는 느낌이다. 분명히 내 마음속에서는 화려한 영상이 재생되고 있는데, 글로 옮겨 적으면 왜 이렇게 건조하고 재미가 없는지. 나홍진 감독의 완벽주의라는 기사를 읽었는데, 그런 집요함이 없으면 시작도 하지 말아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어 잠시 노트북을 덮기도 했다.
결국 다시 첫 페이지를 펼친다
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잘 모르겠다. 이게 드라마 대본이 될지, 아니면 그냥 내 서랍 속에서 썩어갈 휴지 조각이 될지. 학원 선생님들이 말하는 ‘영화적 상상력’이라는 게 이런 벽을 부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. 가끔은 그냥 마음 편하게 시나리오 작법 서적이나 한 권 더 살까 싶기도 하다. 교보문고에서 본 시나리오집이 2만 원대였던 것 같은데, 그거 산다고 내 글이 드라마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. 그래도 어쩌겠나. 이미 벌려놓은 일이니 끝은 봐야지. 다음 주에는 조금 더 구체적인 장면을 써보려고 한다. 주인공이 왜 거기 서 있는지, 왜 그런 말을 했는지에 대해 조금 더 고민해봐야겠다. 물론 내일이 되면 또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겠지만,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이상한 글쓰기를 멈추고 싶지 않다. 사실 만족스러운 결과물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.
A4 용지 반 페이지는 정말 현실을 잘 반영하는 것 같아요. 제가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한 구조를 만들려고 하다가 막혀서 그랬던 것 같네요.
답글
영상학과 합격 수기 보면서 대본 형식을 훑어봤을 때, 설명하는 사람과 보는 사람의 연결고리를 생각하니 좀 부담스럽네요.
답글
대사 쓰는 게 진짜 어렵네요. 저는 OTT 드라마 보면서 비슷한 생각 한 번 해봤는데, 오히려 이야기의 흐름을 제대로 살피지 않으면 엉성해지더라고요.
답글